경주가 수도였을 때, 한양은 어떤 마을이었을까?

오늘날 우리는 대한민국의 수도를 ‘서울’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대에 수도는 경주였습니다. 신라 왕경(王京)으로서 경주는 정치·경제·문화의 모든 중심지였고, 찬란한 불교문화가 꽃피운 국제 도시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기 현재의 서울, 즉 한양 지역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요?

경주의 번영과 달랐던 한양의 위상

경주가 동아시아 교역의 중심지로 향해 나갈 때, 한양은 아직 국가의 수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한강 유역이라는 지리적 장점 덕분에 중요한 요점 역할을 하긴 했습니다.

  • 교통 요충지 : 한강을 통해 물자가 모이고 사람이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경주와 북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요충지였습니다.

  • 군사적 전초 기지 :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각축전을 벌이던 시기에 한양은 전략적으로 핵심적인 장소였습니다. 특히 삼국의 경계에 가까워 군사적 분쟁이 잦기도 했습니다.

  • 농업 기반 마을 : 넓은 평야와 한강의 물줄기를 활용해 농업 생산력이 뛰어났으며, 이는 주변 마을의 생존을 뒷받침했습니다.

천마총만큼 유명하지 않은 신라 왕릉 괘릉

삼국시대의 격전지, 한양

한양은 수도는 아니었지만, 고대사에서 수많은 전투와 권력의 핵심 이동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백제의 초기 수도 위례성이 이곳 한강 유역에 있었다는 점, 고구려가 남하할 때 반드시 점령하려 했던 위치였다는 점은 그 전략적 가치를 잘 보여줍니다.
경주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한양이 누구의 손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삼국의 힘이 크게 달라졌다는 사실은 매우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왜 성곽 도시는 대부분 동쪽으로 입구를 냈을까?

수도 이전 전, 한양은 어떤 삶의 터전이었나

한양은 수도가 되기 전까지는 강을 따라 형성된 중소 마을들의 모임에 가까웠습니다. 사람들이 강을 따라 농사를 짓고, 채집 활동과 물고기 어획 활동으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교역도 이루어졌지만, 경주나 웅진(공주) 같은 도시와 비교하면 그 당시 작은 마을 수준이었습니다.
즉, 오늘날의 화려한 서울은 당시에는 그저 전략적 가치가 높은 변방의 땅이었던 셈입니다.

경복궁
경복궁

비수도권의 역사 재조명

우리가 역사를 볼 때 수도나 중심지 위주로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수도가 아닌 지역에서도 중요한 사건과 문화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한양 역시 ‘변방의 마을’에서 시작했지만,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조선 시대에는 마침내 수도로 자리 잡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