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1776년 왕위에 오르자마자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했습니다. 규장각은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라, 학문 연구와 정책 자문을 맡은 국가 핵심 기관 중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곳에서 활동한 젊은 학자들은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으로 불렸고, 이들이 바로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과 같은 유능한 인물들입니다.
박제가 – 북학파의 실천적 개혁가
박제가(1750~1805)는 대표적인 북학파 실학자로, 『북학의』를 저술해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한 학자입니다. 그는 소비와 무역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개혁적인 경제 사상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규장각에서 외교와 경제 정책 자문을 맡으며, 정조의 개혁 정치에 이론적 기틀을 제공합니다.
이덕무 – 박학다식한 문인
이덕무(1741~1793)는 가난한 서얼 출신이었지만, 엄청난 독서량과 똑똑함으로 정조의 눈에 들어 규장각 검서관이 되었습니다. 그는 『청장관전서』, 『사소절』 등 다양한 서적을 남기며 조선 지식인의 교양과 생활 문화를 집대성했습니다. 이덕무는 특히 책과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해, 오늘날 그를 ‘책의 학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유득공 – 역사와 민족 의식을 일깨운 학자
유득공(1748~1807)은 역사학자로서 조선뿐 아니라 주변 국가의 역사에도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발해고』를 저술하여 발해 역사를 조선사의 중요한 일부로 인식시키게 됩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시각이었으며, 오늘날 민족사관의 선구자로 평가받습니다. 규장각에서 그는 정조에게 역사적 관점에서 정책 조언을 아끼지 않은 인물입니다.
규장각 학자들의 공통점
이들 학자들의 공통점은 출신 신분이 낮거나 서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개혁 인재 등용 정책에 힘입어 검서관으로 지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규장각에서 정책과 학문을 연결시키며, 조선 사회를 새롭게 바꾸려는 실학적 정신을 실천했습니다.
관련 문화유산
오늘날 규장각 학자들의 흔적은 여러 문화유산 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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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규장각 터(서울)
정조가 직접 세운 규장각의 본래 자리로, 지금은 창덕궁 후원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당시 학문 연구와 서적 관리가 이루어지던 공간으로, 조선 지식 집합소처럼 상징적인 장소였습니다. -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현재는 정조의 규장각을 계승한 기관으로, 옛 문헌과 자료를 연구·보존하고 있습니다. 직접 방문하면 규장각 학자들의 흔적을 느낄 수 있습니다. -
유득공 묘(서울 동작구)
유득공의 묘소가 보존되어 있으며, 그의 업적을 기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발해사를 조선사로 편입시킨 혁신적 시각을 되새길 수 있는 공간입니다. -
북학사상 관련 유적지 – 단종의 묘 영월 장릉, 청나라 사신 접대 공간(서울 연행 관련 사적)
박제가가 영향을 받은 북학 사상을 이해하고 싶다면, 청과의 교류 흔적이 남은 관련 유적지를 함께 탐방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마무리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은 단순히 학자가 아니라, 조선 후기의 개혁과 변화를 상징하는 지식인이었습니다. 규장각을 무대로 펼쳐진 그들의 활동은 신분 장벽을 넘어 실력과 사상을 바탕으로 사회를 바꾸려는 실학 정신의 결정체였습니다. 창덕궁 규장각 터와 유득공의 묘, 그리고 관련 문화유산을 방문한다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그들의 학문적 열정을 체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