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총만큼 유명하지 않은 신라 왕릉 괘릉

경주는 신라 천년의 수도답게 수많은 왕릉과 무덤이 남아 있습니다. 그중 가장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은 천마총이나 대릉원 일대의 화려한 고분들일 겁니다. 하지만 경주 동남쪽에 자리한 괘릉(掛陵), 즉 신라 애장왕릉은 상대적으로 덜 유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괘릉은 독특한 석조 조각과 아름다운 배치 덕분에 신라 왕릉 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라 애장왕과 괘릉의 역사

괘릉은 신라 제40대 애장왕(재위 800~809)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애장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나, 왕권이 귀족 세력에 의해 제약받아 정치적 주도권을 뺏긴 군주였습니다. 그가 재위한 시기는 신라가 중앙 권력보다는 지방 세력이 점점 강해지던 신라의 불안정기였습니다.

애장왕은 재위 10년 만에 귀족 세력의 갈등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그의 무덤이 바로 지금의 괘릉입니다. 화려한 정치적 업적은 없었지만, 무덤에 남은 조각과 석물은 당시 신라 예술에 대해 잘 보여줍니다.

괘릉
괘릉

괘릉의 조각과 예술적 가치

괘릉은 신라 왕릉 중에서도 특히 돌로 만든 사람상과 석수(돌짐승)의 아름다움으로 유명합니다.

  • 문무인 석상: 무덤을 지키는 무인상은 옷과 무기를 사실적으로 표현해, 당시 신라인의 옷과 무기 문화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문인상은 온화한 표정으로 지혜를 상징하며 무덤을 지킵니다.

  • 석수 조각: 괘릉에 배치된 돌사자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사후 세계로 가는 길을 지켜주는 수호신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둥근 눈과 힘찬 자세는 신라 조각의 생동감과 아름다움을 잘 보여줍니다.

  • 조형미와 배치: 괘릉은 왕릉답게 봉분과 석물 배치가 정교하고 균형 잡혀 있으며, 예술적 아름다움이 눈에 띕니다. 이는 천마총 같은 발굴 고분이 보여주는 화려한 금관 문화와는 다른, 석조미의 세계를 느끼게 합니다.

괘릉의 역사적 의미

괘릉은 신라 후기 정치적 혼란 속에서 왕권이 약화되는 현실을 반영하는 동시에, 여전히 신라 왕실의 위엄을 표현하려 했던 무덤입니다. 특히 괘릉의 석조 예술은 후대 고려·조선의 석조 조각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사료됩니다.

또한 괘릉은 천마총처럼 대규모 발굴 조사를 통해 금관이나 유물이 공개된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원형이 잘 보존된 신라 왕릉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큽니다.

괘릉을 방문할 수 있는 여행 팁

오늘날 괘릉은 경주 시내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어 비교적 한적하게 관람할 수 있습니다.

  •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일대

  • 주요 볼거리: 괘릉 봉분, 석인상, 석수 조각, 주변의 신라 능묘군

  • 연계 관광: 괘릉을 둘러본 후 서악동 삼층석탑, 무열왕릉, 서악서원 등과 함께 코스를 구성하면 신라 후기 왕릉 문화를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경주 여행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유산 탐방

특히 경주의 대릉원이나 황남대의 화려한 신라 황금문화를 보여준다면, 괘릉은 보다 차분하면서도 웅장한 석조 조각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마무리

경주 괘릉은 천마총만큼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신라 왕릉 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정치적으로 비운의 군주였던 애장왕의 무덤이지만, 무덤을 장식한 석상과 석수는 신라 후기 장인의 솜씨와 미적 감각을 고스란히 전합니다.

경주를 여행할 때 괘릉을 함께 방문한다면, 화려함 뒤에 숨겨진 신라의 또 다른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