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창제 이후에도 한문을 써야 했던 이유는?

1443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조선의 문자 생활은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합니다. 한글은 배우기 쉬우며,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적을 수 있는 문자였기에 백성들의 문해율을 높이고자 했던 세종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한글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조선 사회는 여전히 한문 중심으로 문자를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한문이 지식인 사회의 언어였던 이유 첫째, 한문은 동아시아 국제 사회의 공용어였습니다. … 더 읽기

경주가 수도였을 때, 한양은 어떤 마을이었을까?

오늘날 우리는 대한민국의 수도를 ‘서울’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대에 수도는 경주였습니다. 신라 왕경(王京)으로서 경주는 정치·경제·문화의 모든 중심지였고, 찬란한 불교문화가 꽃피운 국제 도시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기 현재의 서울, 즉 한양 지역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요? 경주의 번영과 달랐던 한양의 위상 경주가 동아시아 교역의 중심지로 향해 나갈 때, 한양은 아직 국가의 수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한강 유역이라는 … 더 읽기

사찰·서원이 자리 잡은 위치의 지형학적 비밀

옛 선조들이 사찰이나 서원을 세울 때는 단순히 땅이 넓거나 경치가 좋은 곳만 찾은 것이 아닙니다. 건축이 들어서는 자리에는 풍수지리학적 원리, 지형적 안정성, 그리고 자연과의 조화가 깊게 녹아들어 있습니다.“왜 하필 그곳일까?”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당시 사람들이 자연을 어떻게 이해하고 생각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찰이 산속에 자리 잡은 이유 사찰은 대체로 산속 깊은 곳이나 산자락에 위치합니다. 불교에서는 … 더 읽기

일제강점기, 문화재는 어떻게 약탈되었나? – 일본으로 간 유물 추적기

일제강점기는 단순한 정치적 지배를 넘어, 한국의 역사와 정체성을 지우기 위해 애썼습니다. 일본은 “고고학 조사”나 “문화재 보호”라는 명목을 내세우며 조선 전국에서 체계적으로 문화재를 뺏어 갔습니다. 특히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고분을 발굴하고, 궁궐과 사찰의 보물을 조사하면서 수많은 귀중한 유물을 일본으로 가져갔습니다. 이는 단순한 도굴이나 개인의 탐욕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조직적 약탈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으로 … 더 읽기

‘백제 금동대향로’를 만든 장인의 하루는 어땠을까?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된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는 높이 61.8cm, 직경 19cm의 멋있는 향로입니다. 뚜껑에는 신화적 동물과 산악 풍경, 연꽃잎과 봉황이 조각되어 있으며, 전체가 하나의 우주를 나타내고 있는 작품입니다. 발굴 이후 “백제 예술의 정수”라 불리는 이 향로는, 그 자체로 장인들의 솜씨와 기술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을 만든 장인의 하루는 어떠했을까요? 아침 – 불을 지피며 시작하는 … 더 읽기

‘역사 속 식물원’ 궁궐 속 화초와 식물 문화유산의 미학

오늘날 식물원은 자연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이면서 사랑받는 장소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사실 궁궐 속 화초와 정원은 이미 오래전부터 왕실과 지배층의 식물에 대한 사랑과 문화유산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조선의 궁궐은 단순한 정치 공간이 아니라, 화초와 나무, 정원과 연못이 어우러진 거대한 식물원이기도 했습니다. 궁궐 정원 권력과 미학의 상징 조선의 궁궐은 정치적 위상과 권위를 상징하면서도, 동시에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공간으로 … 더 읽기

‘광해군의 흔적은 어디에?’ – 폐위된 왕이 남긴 문화유산 추적기

조선 15대 왕 광해군(재위 1608~1623)은 흔히 “폐위된 왕”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면서 정통성에서 밀려났고, 정사(正史)인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그 평가가 매우 부정적으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시선을 조금 달리하면, 광해군은 분명 격변의 시대를 버텨낸 군주이자, 문화유산을 남긴 인물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쟁의 상흔과 광해군의 현실 정치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임진왜란 때 세자로 책봉되어 … 더 읽기

사라진 궁궐, 경희궁을 아시나요?

서울 서대문구에 자리했던 경희궁(慶熙宮)은 조선 후기 5대 궁궐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경희궁은 경복궁이나 창덕궁, 창경궁처럼 온전히 남아 있지 않고, 일부 전각과 터만이 남았습니다. ‘사라진 궁궐’이라 불릴 만큼 잊혀졌지만, 경희궁의 역사는 조선 후기 정치와 문화,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건물입니다. 경희궁의 건립과 역할 경희궁은 1617년(광해군 9년)에 건립되었습니다. 원래 이름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인조가 즉위 후 이름을 … 더 읽기

왜 성곽 도시는 대부분 동쪽으로 입구를 냈을까?

동대문

한반도 곳곳의 옛 성곽 도시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주요 입구, 즉 동문(東門)이 가장 크고 화려하게 꾸며졌다는 점입니다.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전통 도시 건축에 깃든 풍수적 사상과 군사적 전략, 사회적 기능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풍수지리와 동쪽의 의미 전통적으로 동쪽은 해가 떠오르는 방향, 곧 새로운 시작과 생명력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유교적 세계관에서도 동쪽은 봄(靑龍方)에 해당하여, … 더 읽기

“금강산 유람록” 속 여행기를 따라가는 조선시대 지식인의 시선

조선시대에 금강산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정신적으로 바라는 이상향이었습니다. 유교적 학문에 매여 있던 선비들이 자연을 벗 삼아 속세를 벗어나고자 했던 마음은, 수많은 금강산 유람록(遊覽錄)이라는 여행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이 기록들은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조선 지식인의 세계관과 미학, 그리고 자기 성찰을 담아낸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 금강산, 조선 지식인의 이상향 금강산은 예로부터 “산은 금강, 물은 설악”이라 불릴 … 더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