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파리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전 세계 관광객의 사랑을 받는 에펠탑(Eiffel Tower). 하지만 이 아름다운 철탑은 처음부터 모두의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19세기 말, 프랑스는 과학기술의 진보와 국가의 위상을 보여줄 새로운 상징이 필요했고, 그렇게 해서 세워진 것이 바로 에펠탑입니다. 이 글에서는 에펠탑이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사회적 맥락, 그리고 건축가 귀스타브 에펠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1. 세계박람회(엑스포)와 프랑스의 자존심
에펠탑의 건립은 1889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제4회 세계박람회(만국박람회, Exposition Universelle)를 기념하기 위해 추진되었습니다.
- 1889년: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
- 목적: 프랑스의 기술력과 문화적 우월성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 위치: 센 강변 샹드마르스(Champ de Mars)
당시 세계 각국은 자국의 산업, 과학, 예술을 뽐낼 수 있는 무대로 세계박람회를 활용했고, 프랑스도 이에 맞춰 당시로선 세계 최고 높이의 구조물을 건설해 세계의 이목을 끌고자 했습니다.

2. 귀스타브 에펠과 혁신적 철골 구조
귀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은 이미 철도교량과 철골 구조물 분야에서 명성을 쌓은 프랑스의 토목 기술자였습니다. 에펠은 동료 엔지니어들과 함께 300m 높이의 철탑 아이디어를 제안했고, 정부로부터 공식 승인도 받게 됩니다.
- 건설 시작: 1887년 1월
- 완공: 1889년 3월
- 총 높이: 300m (현재는 안테나 포함 약 330m)
- 사용된 철강: 약 7,300톤
- 건축 기간: 약 2년 2개월
당시로서는 전례 없는 대형 철골 구조물이었으며, 조립식 공법과 정밀한 수학적 계산을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이는 현대 건축과 공학에 큰 영향을 준 선구적인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3. 건설 당시의 논란과 반대
에펠탑이 세워질 당시, 파리의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이 구조물을 “도시 미관을 해치는 흉물”이라며 격렬히 반대했습니다.
“우리는 이 거대한 철제 기둥이 파리의 고상한 풍경을 파괴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 – 파리 예술인들의 공개 서한 중
특히 문학가 모파상은 에펠탑을 싫어했지만, 매일 탑 안 식당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이유는 “파리에서 유일하게 에펠탑이 안 보이는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4. 박람회 이후의 역할 변화
에펠탑은 박람회가 끝난 후 철거될 예정이었지만, 이후 통신 및 기상 관측용 안테나로 활용되면서 보존되었습니다.
- 1903년: 무선 송신 실험 시작
- 1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 통신 차단에 활용
- 현재: 라디오·TV 방송 송신기지로 여전히 사용
5. 현재의 상징성과 세계적 명성
현재 에펠탑은 연간 약 700만 명이 방문하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유료 관광지 중 하나입니다. 프랑스의 기술, 문화, 예술을 대표하는 상징이자, 건축학적으로도 큰 가치를 지닌 구조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결론
에펠탑은 단순한 철탑이 아닙니다. 그것은 프랑스가 근대에 들어선 과정, 과학 기술의 자부심,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을 담고 있는 역사적 상징물입니다. 세계박람회라는 국제적 무대에서 출발했지만, 오늘날에는 전 세계인에게 예술과 기술의 만남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파리를 방문하게 된다면, 단순히 멋진 사진만이 아니라 에펠탑이 가진 역사적 배경과 논쟁을 함께 되새겨보는 것도 의미 있는 경험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