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1674~1720)은 장희빈의 아들로, 1720년 숙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았고, 정치적 기반 또한 약했습니다. 이에 서인과 남인, 소론과 노론으로 갈라진 당파들은 왕권을 둘러싼 치열한 갈등을 벌였습니다.
연잉군은 숙종과 숙빈 최씨의 아들로, 장희빈이 몰락한 뒤 왕실 내에서 점차 입지를 굳혔습니다. 학문과 인품으로 인정받았으며, 무엇보다 소론과 노론 일부가 후계 문제를 염두에 두고 그를 지지했습니다. 경종의 건강 악화가 알려지자 연잉군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하게 제기되었습니다.
1721년과 1722년 벌어진 신임사화는 경종과 연잉군의 왕위 계승 문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소론은 경종의 권위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연잉군을 견제했고, 노론은 연잉군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결국 소론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노론 인사 수백 명이 처형되거나 유배되는 대규모 정치적 숙청이 벌어졌습니다.
1724년 경종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연잉군이 즉위해 영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종이 독살되었다는 의혹이 퍼지면서 정치적 불신과 갈등은 계속되었습니다. 영조는 이러한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탕평 정치를 내세우며 당파를 초월한 국정 운영을 시도했습니다.
경종과 연잉군의 왕위 계승 갈등은 조선 후기 정치사의 심각한 당쟁 문제를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동시에 이 갈등을 수습하려는 노력에서 영조의 탕평 정치가 태어나게 되었으며, 이는 조선 후기 국가 운영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현장을 답사할 때는 단순한 형제 갈등이 아닌, 당쟁과 권력 구조가 얽힌 복합적 사건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