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죽교는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예상하고, 지금까지도 당시의 돌다리 건축 기법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화강암 판석을 평평하게 다듬어 다리 위를 잇고, 기초에는 큰 돌을 깔아 물살을 견딜 수 있게 한 구조는 고려 건축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줍니다.
다리는 크지 않지만, 당시 실용성과 미학을 함께 고려한 돌다리 건축의 대표 건축물로 평가됩니다. 단순하고 소박하면서도 오랜 세월을 버틴 견고함 속에서 고려시대의 생활 모습과 기술이 담겨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선죽교는 정몽주와 이방원의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몽주는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지키다 이방원의 세력에 의해 이 다리에서 죽음을 당했고, 그때 흘린 피가 대나무 잎에 스며 붉은색으로 남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다리 옆에는 ‘선죽교 단심가비’가 세워져 있어, 이 사건이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 전설의 세부가 사실과 다를 가능성도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선죽교를 역사와 전설이 뒤섞인 상징적 장소로 바라봅니다.
선죽교의 가치는 단순히 다리 하나의 건축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이곳은 고려의 기술로 지어진 다리 위에서 조선 건국의 정치적 사건이 벌어진, 두 왕조의 교차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선죽교는 건축유산이자 동시에 정치사적 상징적인 공간입니다.
선죽교는 현재 북한 개성에 있으며, 우리에게는 남북분단으로 인해 쉽게 접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교과서와 문헌 속에서 꾸준히 등장하며, 한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장소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또한 선죽교는 단순히 정치적 사건을 넘어, 충절과 권력의 갈등, 왕조 교체의 상징성을 담고 있어 역사 교육과 문화적 의미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성 선죽교는 고려 초기 석교 건축의 흔적을 간직한 동시에,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의 가장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진 장소입니다. 전설과 역사가 뒤엉킨 이 다리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권력과 충성, 그리고 시대의 전환기에 인간이 선택해야 했던 가치들에 대해 많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