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은 1617년(광해군 9년)에 건립되었습니다. 원래 이름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인조가 즉위 후 이름을 바꿔 ‘경희궁’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궁궐은 주로 임시 거처(이궁, 離宮)로 사용되었으며, 경복궁이 불타거나 수리 중일 때 국왕이 머무르는 곳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인조·효종·숙종 등 여러 임금이 실제로 경희궁에서 나라 일을 보며 국가의 중요한 일을 처리하기도 했습니다.
경희궁은 조선 후기까지 위상을 유지했으나, 고종 이후 점차 사라졌습니다. 가장 큰 비극은 일제강점기에 찾아오게 됩니다.
일본은 경희궁 부지를 훼손하고, 건물 대부분을 철거합니다.
경희궁의 주요 전각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는데, 대표적으로 숭정전은 서울의 서울고등학교 강당으로 사용된 적도 있습니다.
결국 경희궁의 원래 모습은 대부분 사라지고, 궁궐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20세기 후반부터 경희궁 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현재 일부 전각이 재건되어 시민들에게 공개했습니다.
숭정전: 국왕이 공식 행사를 치르던 정전으로, 경희궁의 상징적 건물입니다. 현재는 복원되어 궁궐의 위용을 다시 느껴볼 수 있습니다.
흥화문: 경희궁의 정문으로, 오랜 세월 서울시립미술관 앞에 따로 서 있다가 제자리를 찾아 왔습니다.
발굴 조사: 발굴 과정에서 기단, 초석, 배수로 등이 확인되어, 당시 궁궐의 배치와 건축 구조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경희궁은 완전히 보존되지 못했지만, 그 자체로 조선 후기 궁궐 문화의 다양한 의미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왕권의 상징이면서도, 임시 궁궐로서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훼손은 문화재 수탈과 민족의 아픔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복원과 발굴은 역사 회복과 기억의 재건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지금의 경희궁은 다른 궁궐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오히려 그 소박한 흔적이 역사적으로 더 큰 상징성을 보여줍니다. 서울 도심 속에서 산책하듯 거닐며, ‘사라진 궁궐’을 상상하는 경험은 시간 여행과 같은 특별한 감동을 전해줍니다.
경희궁은 화려함 대신 상처와 흔적을 남긴 궁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잔해 속에서 우리는 조선 후기 왕실의 삶, 일제강점기의 아픔, 그리고 역사를 되살리려는 오늘의 노력을 함께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경희궁을 찾는 일은 단순한 유적 답사를 넘어, 잊힌 역사를 기억하는 작은 실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